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국공합작 (문단 편집) === 중국 공산당의 통일전선 방침 === 한편 코민테른은 국민당이나 우페이푸, 천중밍 등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자 군벌들과의 합작을 종용하고 있었지만 중국공산당 내부에서는 이에 대해 의견이 엇갈렸다. 1921년 7월의 제1차 대표대회에서 '기타 당파에 대한 정책'을 놓고 공산당원들 사이에서는 논쟁이 벌어졌다. 일부는 무산계급은 기타 정당과는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일부는 기타 정당과의 합작 필요성을 주장했다. 국민당에 대해서도 [[북양군벌]]보다는 진보적이라는 고평가도 있었지만 북양군벌이나 남방정부나 모두 한통속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있었다. 결국 의견이 통일되지 않아 "우리 당은 현재 존재하는 모든 정당에 대하여 독립, 공격, 배타적 태도를 가진다. 정치투쟁에서 군벌주의와 관료주의를 반대하는 속에서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요구하는 속에서 우리들이 우리들의 태도를 반드시 표방할 때에는 우리 당은 무산계급의 입장을 견지하며 기타 어떠한 정당과 어떠한 관계 성립도 불허한다."는 배타적인 태도의 결의를 통과시켰다. 하지만 국민당에게 합작 가능성에 대해 타진하고 있던 코민테른 대표 마링은 대회가 폐막된 후 중국공산당 지도부에게 "우리는 무산계급정당으로서 현재의 임무는 바로 정치무대로 나아가는 것이므로 천두슈는 광저우에서의 공직을 버리고 돌아와 국공합작에 대한 문제를 논의해야 할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확실히 일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과의 연대 필요성이 완전히 부정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로 규정된 [[천중밍]], [[우페이푸]] 등과 접촉하였다. 천중밍은 중국 공산당과 연계하여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공산당과의 합작을 먼저 제의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왔는데 이에 따라 1920년 천두슈가 교육위원회 위원장으로 초빙되는가 하면 1921년 8월 공산당원 [[펑파이]]가 해풍현 근학소장에 임명되었고[* 이후 펑파이는 [[국공결렬]] 이후 해풍 지역에 해륙풍 소비에트를 건설했다.] 공산당은 천중밍과 함께 감조운동을 전개하고 광동에서 선전활동을 벌였다. 이 때문에 공산당 내부에서는 임조함, 담평산, 천궁보 등이 쑨원을 환상주의자로 비판하며 천중밍과 합작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했다. 우페이푸 역시 철도산업을 독점한 교통계에 대한 탄압을 위해 공산당을 이용하고자 했는데 공산당 역시 철도노동자조합 건설을 위해 우페이푸와 연계하였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은 당내합작이라는 형태의 국공합작에 대해서는 반대를 분명히 표했다. 1922년 4월 6일 천두슈는 보이틴스키에게 국공합작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반대했다. * 1. 중국공산당과 중국국민당의 혁명 목표와 지지 기층이 다르다. * 2. 중국국민당은 국제적으로 미국과 연합하고 국내적으로는 [[봉천군벌]], [[안휘군벌]]과 연합하여 공산주의와는 서로 용납되지 않는다. * 3. 중국국민당은 당강을 발표한 일이 없어 광동 이외의 사람들은 이권을 쟁탈하는 정당으로 간주하여 중국공산당이 가입하면 발전할 기회가 없어진다. * 4. 광동의 실력파 천중밍이 쑨원을 반대하여 공산당원이 중국 국민당에 가입하면 천중밍이 중국공산당을 적대시하여 광저우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될 것이다. * 5. 이미 각지의 중국공산당 당원들이 회의를 열어 중국 국민당에 가입을 찬성하지 않아 사실상 가입할 가능성이 없다. 한편 천중밍은 중국혁명이 아니라 지역적인 정권의 공고화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평가가 하락했고 1922년 6월 16일 [[영풍함 사건]]이 일어나자 중국 공산당은 쑨원 지지 선언을 발표하면서 천중밍과 결렬했고 담평산 등 천중밍을 지지한 공산당원들을 징계했다. 코민테른이 천중밍에 대한 관심을 끊으면서 천중밍은 공산당의 합작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1922년 7월 16일부터 7월 23일까지 상하이에서 중국 공산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되어 중국 공산당은 코민테른에 가입, 코민테른의 중국 지부가 되겠다고 결의한 바가 있었다. 천두슈가 국공합작에 대해 반대를 분명히 하자 마링은 코민테른을 움직이기로 했다. 1922년 7월 모스크바에 돌아간 마링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중국국민당을 단순한 부르주아 정당이 아니라 여러 계급의 연맹이며 민족 혁명 운동에 힘이 있는 진보적 정당임을 강조하며 국공합작이 필요함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코민테른은 마링의 건의를 받아들여 7월 18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게 통지를 접수하는 대로 즉시 당의 주소를 광저우로 옮기고 모든 활동에 대해 마링과 긴밀히 연락하라고 지시했다. 이러한 지시를 받은 중국 공산당은 1922년 8월 하순, 항저우 서호에서 이틀 동안 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천두슈]], [[리다자오]], [[차이허썬]], [[장궈타오]], 고군우, 마링, [[장타이레이]] 7인이 참석했다. 마링은 중국공산당에게 코민테른의 7월 지시와 8월 지시에 따른 중국 국민당에 대한 태도를 밝히고 당내 합작 방식으로 국공 통일전선을 달성할 것을 지시했다. 리다자오는 국공합작에 찬성하는 의견을 보였으나 장궈타오는 당내 합작은 당 정책을 견제받는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천두슈는 코민테른의 결정이라면 복종할 수 있으나 반드시 조건을 제시해야 한다면서 쑨원 앞에서 서약해야 하는 입당 방법을 취소하고 중국국민당을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회의 결과, 중국 공산당은 대다수가 당내 합작에 찬성하여 중국국민당에 가입하자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당연히 중국공산당의 입장으로서는 자신들이 코민테른의 하부조직으로 코민테른의 대표 의견을 추종해야 한다는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중국공산당이 사용하는 경비의 94%가[* 1921년 10월부터 1922년 6월까지 공산당은 17,655원의 자금을 조달했는데 이중에서 공산당이 직접 구한 것은 천원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전부 다 코민테른이 준 것이다.] 코민테른에게서 지원되고 있었으므로 코민테른에 절대 복종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이후에도 우페이푸와 공산당의 동맹 추진이 진행되었다. 1922년 7월 러시아 SFSR 외교인민위원부 극동사무전권대표 빌렌스키는 우페이푸를 중국 정치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소개하고 군대, 재정, 교통, 내정부를 장악하고 남방의 다수 성의 지지를 받으며 그 위세는 쑨원을 무너뜨리기 직전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우페이푸와의 회담 역시 유익하고 의의있다고 보고했다. 우페이푸가 소련과의 접촉에 적극적으로 나온 것은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우페이푸가 교통계 탄압을 위해 공산당의 힘을 빌리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1922년 9월~10월 중국공산당은 우페이푸와 협상하여 교통부에 공산당원들을 파견한다는 합의를 보았다. 이로 인하여 경한철도를 중심으로 노동자 조직이 형성되어 강력한 노동운동을 전개해 교통계를 타도했고 1922년 11월에 개최된 코민테른 제4차 대표대회에서 카를 라데크는 우페이푸와 연합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노동운동이 급격히 성장한 것을 우려한 우페이푸는 1923년 [[2.7 사건]]을 일으켜 50여명의 노동자를 살해하고 300명에게 부상을 입혀 노동운동을 탄압했다. 이 때문에 분노한 공산당은 우페이푸와도 결렬했고 공산당과 합작할 수 있는 세력은 국민당만 남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